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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From Fr. Macario

오늘의 묵상 From Fr. Macario

[ 2026.4.17 ]

요한 6,1-15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5-9)

오늘 여섯 분의 관구장 수녀님은 연수회를 마치고 로마를 떠나 다시 원래의 사명의 자리로 파견받는 순간 앞에 서 있습니다. 또한 총장 수녀님과 평의회 수녀님들께서는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이 파견은 단순히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일이 아닙니다. 새로운 사명으로의 파견은 다시 익숙함에서 떠나는 것이고, 안전하다고 느끼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며, 내가 알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어 왔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보겠다는 약속을 실행하는 시간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파견은 내적인 떠남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잘 보이지 않는 길 위에 서게 됩니다. 그 길은 언제나 확신보다 질문을 동반하고, 평온보다 긴장을 동반하며, 때로는 깊은 고독과 두려움까지 동반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느님의 신비는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확실함 속에서가 아니라 여러분의 불확실함 속에서 더욱 분명히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군중을 바라보십니다. 굶주린 사람들, 지쳐 있는 사람들, 방향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질문하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이 질문은 단순한 해결책을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믿음을 깨우는 질문이며, 책임을 일깨우는 질문이며, 삶의 방향을 묻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지금도 우리 공동체의 한가운데에서 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동체가 어려움에 처할 때, 사명의 무게가 버겁게 느껴질 때, 관계가 긴장으로 가득 찰 때, 또 다른 질문을 물으십니다: “너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느냐?”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사도 필립보처럼 부족함을 먼저 보고 있습니까. 현실의 벽의 높이를 가늠하고 있습니까? 불가능의 숫자를 계산하고 있습니까? 사실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계산하고, 비교하고,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할 수 없는 이유를 먼저 찾고, 변화의 위험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넘어 하느님의 가능성을 보는 용기입니다. 하느님의 신비는 언제나 부족함의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충만함 속에서가 아니라 비어 있음 속에서, 힘이 아니라 자기 비움 속에서 하느님의 역사는 드러납니다. 자신을 비우신 그리스도처럼, (필리 2,7) 하느님은 비워진 마음 안에서 일하십니다.

복음은 또 한 사람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사도 안드레아입니다. 그는 군중 속에서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한 아이를 발견합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작은 선물, 그러나 그는 그것을 예수님께 가져옵니다. 이 장면은 관구장의 길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보여 줍니다. 관구장이 걸어야하는 길은 거대한 계획을 세우고 강력한 결정을 내리는 길이기도 하지만 자매 수녀님 각자에게 숨겨진 하느님의 은총과 선물을 알아보는 길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눈, 아무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품어 주는 마음, 아무도 믿지 않는 가능성을 끝까지 지켜 주는 용기가 관구장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연수회를 마치고 다시 공동체의 현실 속으로 돌아가는 여섯 분 수녀님께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은 바로 이 눈입니다. 보이는 것 너머를 보는 눈, 작은 것 안에서 하느님의 가능성을 보는 눈말입니다. 이 눈은 성과 중심의 시선을 내려놓는 눈이며, 판단보다 기다림을 선택하는 눈이고, 겉으로 드러난 힘보다 내면에서 자라는 생명을 알아보는 눈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긴장이 일어날 때 우리는 그것을 위기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긴장은 때로 성령께서 공동체를 흔드시는 순간일 수 있습니다. 균열은 무너짐의 시작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자리일 수 있습니다. 씨앗이 싹트기 위해서는 땅이 갈라져야 하듯이, 공동체도 성장하기 위해서는 흔들림을 통과해야 합니다. 신비는 언제나 안정 속에서가 아니라 흔들림 속에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제 복음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옵니다. 아이의 빵과 물고기가 예수님의 손에 들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기적의 시작이 아니라 성체성사의 신비를 미리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작은 것이 나눔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처럼 수많은 사람을 살리는 양식이 됩니다. 이것이 공동체의 신비이며, 이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그렇다면 관구장 수녀님들께서는 어떻게 자매 수녀님들이 갖고 계신 작게 보이는 그 무엇 즉 빵 다섯개와 물고기 2마리를 주님의 손에서 축복을 받고 자매 수녀님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나누시겠습니까?

앞으로 공동체 안에서 수녀님들께서는 수없이 많은 작은 것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작은 희망, 작은 믿음, 작은 재능, 작은 변화, 작은 자원, 작은 배려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너무 작아서 실망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것을 포기하지 맙시다. 하느님의 나라는 언제나 겨자씨처럼 시작됩니다. 공동체의 성장은 강한 통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나눔에서 옵니다. 어떤 사람의 성장은 다른 사람의 삶 속으로 조용히 스며드는 사랑을 통해 일어납니다. 관구장의 사명은 바로 그 사랑이 흐르도록 길을 열어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임금으로 세우려 하자 “다시 혼자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으로 물러가신 모습은, 리더십의 중심이 권력에 있지 않고 기도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공동체를 움직이는 힘은 카리스마나 통제력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인내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수도자의 리더십은 결국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공동체를 지탱하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당신의 사명이 세속적 권력이나 대중의 기대에 의해 규정되지 않도록 하신 선택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관구장 수녀님에 도전을 던집니다. 공동체는 때때로 강한 결단, 빠른 해결, 분명한 지시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참된 수도자의 리더십은 모든 것을 즉시 해결하는 능력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 앞에 오래 머물 수 있는 내적 자유와 침묵에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산으로 물러가신 것은 사람들을 외면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였습니다. 수녀님이 사무실에서 물러나 머무실 산은 어디에 있습니까?

질문: 내가 나누어야 할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빵 다섯개와 물고기 2마리는 무엇인가?